삶에는 의무가 있다.
태안장로교회 원로목사
태안자살방지생명지킴이협회장
글:-남제현목사
태안신문사 칼럼니스트
사람은 동물적 속성인 신체적인 부분과 신적 속성인 영과 정신적인 부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인간은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킬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신체적 물질적인 부분과 정신적 영적 부분의 속성을 잘 유지하면서 건전한 정신에 만족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의무와 선택으로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 사람은 나에게서 끝이 아니라 내 자식, 손자, 증손자까지 이어지는 더 삶이 이어 가야 한다. 자녀들은 내 삶의 향상은 본능적인 부분이다.
다른 동물들과 다르기에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반드시 물질적 의무가 있고, 만약에 내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공동체의 형제나 이웃이 나 대신 책임을 지기 때문에 결국 이웃과 사회의 해악이 되는 것이다. 정신적 행복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하지만 잘못 돈을 모아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돈만 추구하는 정글 사회가 될 것이다. 치열한 경쟁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내가 쓰는 시간, 에너지, 노력이 최소한 갖추어졌다면 그다음에는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선택에 새해를 맞이한 큰 소원이 바라는 것도 여기에 있다.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 하지기를 바라는 소원이다. 그러나 바라는 생존에 주어진 의무를 포기하는 것은 선택적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다. 해가 바뀌면서 잘못 살아온 삶을 반성하는 것도 내 삶을 의무로 평생 세상을 살아가는 방향설정을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끔 삶의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곤 한다.
지금까지 내내 믿고 의지하던 앎이나 신념에 인간관계가 제자리를 잃고 비틀대는 순간이 있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의 오이디푸스가 자기에게 내려진 무서운 저주를 알고 삶의 기반이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은 그간의 지식이든 지위이든 권력이든 재력이든 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삶의 도구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나 절을 찾아가기도 하고 무속인을 찾아가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삶을 혼란하고 방향을 잃고 나면 신전을 찾아가 신탁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나를 알고 자신에 기준을 정해 주었다. 사람은 삶에 기준점이 없을 때 조절 없는 동물과 같은 삶으로 변한다. 대부분 사람은 기준이 없고 인정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할 때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분노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양심을 따라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양심을 따라 살았다고 하지만 객관적이고 합리적 인정이 있어야 한다. 지난해 교수들이 뽑은 사자성어 아시타비(我是他非)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으로 '내로남불'을 한자로 옮긴 신조어다. 남의 허물을 헐뜯기 좋아하는 삶을 사회를 더욱 혼란할 수밖에 없고 자손에 대한 교육적 삶에 의무를 다할 수 없다. 독일 마이클 린든 교수는 한국인의 울분은 갑질과 특혜, 불공정이 한국사회의 지배적 감정 중 하나로 보았다.
코로나19는 안정을 얻을 만한 하면 또다시 긴장된 정보에 국민의 감정은 불안과 분노가 유발되어 국민 절반 가까이가 만성적 울분을 느끼는 울분 사회라는 증거이다. 분노는 부당하거나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리라 여겼던 세상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경험하는 감정들이다. 코로나로 일자리를 잃은 실직자들의 울분이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울분에는 우울과 분노에 무기력만이 더해질 뿐이다.
깊게 쌓인 무기력에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자동차 운전에 끼어들기를 당하면 분노가 생기게 이유는 대인관계에서 부당하게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생긴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면 분노가 생긴다. 심지어 친구에게 부모에게 자식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무시당하면 분노가 생겨 결국은 자신에게 큰 피해가 된다. 지금 우리가 사회적 일부는 평등하지 못해 정의가 짓밟혀 있다고 생각하는 원인은 그 모두가 자기 기준의 판단에서 온다.
“늙을수록 망령이 든다” 속담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들었다면 지혜로운 마음씨의 보물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마음과 가슴에 심는 씨앗으로 남아 오랜 시간 후에 열매를 같게 된다. 상대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달라짐을 명심하면 된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의 불평과 분노의 모든 사태는‘내가 먼저'라는 자세에서 벗어나 ‘너 자신을 알라’는 명언은 명령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삶에 의무임을 명심하고 살면 될 것이다.